2013년 1월 30일 수요일

4. 내 생각


 4. 내 생각

우리의 손으로 쓰여 졌다는 고구려의 〈유기 留記〉와〈신집 新集〉, 백제의〈서기 書記〉, 신라의 〈국사 國史〉, 가야의 〈가락국기 駕洛國記〉어느 하나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 등만이 간신히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다행히 남아 전해졌다는 유일한 사료라고 할 수 있는 한단고기(桓檀古記) 조차 위서(僞書) 시비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심각한 사료 부족으로 결국에는 거의 전적으로 중국 측의 사료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고조선시대의 자료는 사기(史記)의 조선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그리고 후한서 등 이 거의 전부라고 할 것이다. 이런 자료라도 남아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 문명과 문화의 주체가 전혀 아닐뿐더러 그에 대해 무지하다고 할 제3자인 중국인의 입장에서 서술한 자료들에 대해 무작정 신뢰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북한에 대한 오보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고학 또한 그 자체의 한계가 있을뿐더러 한반도내에서만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한 현 시점에서 깊이 있고 정밀한 연구에는 한계가 없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을 무작정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현실에서는 결국 모든 가능성의 지평(地平)을 열어놓고 그나마 전해오는 신화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얻어지는 해석을 총동원하는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때로는 직관에 의한 방법까지도 허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설을 구성하고 엄밀히 검증하여 사실을 추구해 나가는 방법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도 부족한 사료로 인해 차라리 우리 상고사의 연구범위는 고증학과 고고학 등을 넘어서 언어학과 신화학, 종교학 나아가서 인류학 등으로 더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상고사는 무한한 상상(想像)의 보고인 셈이고, 그나마 지금 남아 전해오는 사료들은 다행스럽게도 그 최소한의 틀은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댓글 6개:

  1. 留記

    고구려 초기의 역사책.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분량은 100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영양왕 때 이문진(李文眞)이 이를 바탕으로 〈신집 新集〉 5권을 편찬했다고 하나, 이 책들이 모두 전하지 않아 내용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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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新集

    고구려의 역사책.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왕명을 받아 고사(古史)를 요약하여 〈신집〉 5권을 편찬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유기 留記〉를 말하는데, 이것이 책 이름인지 또는 막연한 기록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유기〉를 바탕으로 〈신집〉을 다시 편찬하게 된 것은 당시 고구려 사회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현실적·실용적인 성격의 역사책이 필요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100권에 달했다는 〈유기〉와 달리 〈신집〉이 5권에 불과했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유기〉를 요약한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료를 취사선택함으로써 책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음을 말한다. 그러나 〈신집〉이 현실적·실용적 목적에서 편찬된 것이라기보다는 〈유기〉의 내용을 다듬고 요약한 데 그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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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書記

    백제 중기의 학자 고흥(高興)이 지은 백제의 역사책.〈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근초고왕 본기의 끝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더니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갖게 되었다"라고 했다. 현재 백제의 역사책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다"는 것은, 문자를 사용한 문서기록이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편찬된 역사기록이 없었음을 뜻한다. 〈서기〉를 백제의 역사책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보통명사로 해석하여 공식적인 문서기록이 제도화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제는 일찍이 낙랑이나 대방군의 한인(漢人)을 흡수해 높은 수준의 한문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여 전라도 일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지방까지 진출하는 정복활동을 벌이는 한편 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강화한 것이 근초고왕 때였다. 따라서 신라의 역사책인 〈국사 國史〉가 진흥왕 때 편찬된 것을 감안하면,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역사책이 편찬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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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國史

    신라 진흥왕 때 거칠부(居柒夫)가 편찬한 역사서. 현재 전하지 않아 정확한 책수와 편찬연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 때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의 건의에 의하여 거칠부가 여러 문사들과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영토확장과 대외적인 발전을 이룬 뒤, 이를 배경으로 하여 국가의 위신을 안팎으로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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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駕洛國記

    가락국의 역사책.고려 문종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편찬했다. 완전한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삼국유사〉 기이편에 간단하게나마 기록되어 있어 가락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에 대한 이야기,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 때까지 김해지방의 연혁, 가락국의 왕력(王曆)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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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북한에 대한 오보는 수없이 많다. 몇 개를 예로 들면, 일본 언론 등에서 반복된 김일성을 수시로 죽였다 살렸다했던 사망설 오보에서부터, 닮아서 김정일 아들이라고 농담한 어떤 무속인의 사진이 김정은의 사진으로 탈바꿈되어 보도 되거나 북한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나온 여배우 한예슬이 엉뚱하게 북한얼짱이란 이름으로 중국 인터넷에서 회자된 사례, 무엇보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박근혜씨를 김정일의 네 번째 부인으로 보도했던 사례에 이르기 까지 어떨 때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도 이러한데 그 시대에는 어떠했겠으며 그게 언제쩍 이야기인가? 우리는 신성구역으로 금단구역인 소도도 있던 나라다. 중국 측 사료는 그야 말로 ‘카더라’ 수준에서 부침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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